디디의 우산
황정은
비대한 자아와 형편없는 자존감이 뒤죽박죽 섞인 인격을 아무에게나 들이대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타인. 거짓말로 살아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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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런 식으로 닮았고 d의 부모가 그런 식으로 서로를 닮았고 아마도 d 역시 부모와 그런 식으로 닮았을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산 사람들은, 가장 방심한 얼굴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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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상가와 사십년간 맥을 함께한 인간인데 내게 질문 하나 해오지 않는 프로젝트는, 됐다고 여소녀는 생각했다. 담배를 피우며 구조물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이것은 참으로...훌륭한 상징이라고 여소녀는 생각했다. 뜬금없고 남의 일 같다는 점에서 훌륭하게 상징하는 바가 있었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번 것을 비롯해 도시의 이름으로 계획되는 프로젝트는 여소녀에겐 음모이자 꿍꿍이일 뿐이었다. 공적 기관의 예산이 책정되고 집행되는 프로젝트일 뿐. 나와는 무관한. 어디까지나 내가 소외된 상태로 소개되는. 언제나와 같이. 그 상징물엔 여소녀라는 맥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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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넘어온 이유가 환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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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의 형태로 종이를 수집한다.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노트보다 무언가 인쇄된 책이 종이로서 더 완전하다고 나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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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권위 없음을 혐오한다. 그는 힘없음을 혐오한다. 그는 약함을 혐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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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정해볼까. 아버지가 말하는 권위는 곧 힘이고 힘이란 곧 누군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누가 들을까 두려워 급하게 자식의 입을 틀어막게 만다는 힘, 그는 그런 힘을 경험했고 그것이 힘이라는 것을 알며 힘이란 곧 그게 되었다. 그게 없음을 그는 혐오한다. '권위 없음' 을 혐오한다. 누구도 '권위 없음' 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권위 없음' 상태를 두려워한다. 그가 누군가의 '권위 없음'을 비난할 때 그에게는 그것을 하는 '권위'가 있으므로 그는 힘없음을 힘껏 혐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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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정치적 견해가 달라 딸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고 그가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면 나는 그 판단에 동의할 수 있다. 김소리와 나는 그 갈등의 가시적 기원을 일단 김소리의 상견례에 두고 있다.(...) 아버지는 조만간 종로 근처로 만나러 갈 테니 둘이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제안한 그쪽 집안의 아버지를, 사돈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분개했다. 내가 자기를 왜 만나느냐고, 지가 만나러 오면 내가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냐, 그 여유가 다 뭐냐고 아들 가진 놈이라고 다 가졌다 이거냐고 말했다. 그 여유 있는 표정! 사돈의 미소를 그는 이렇게 일컬었다.
승자의 미소.
(...)
그는 순간의 말 몇마디로 수십년 묵은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드러냄으로써 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켰는데 김소리와 내가 그 나이에 이를 때까지 그의 그런 생각, 기분, 감정을 느낀 적도 짐작도 없다는 점은, 오히려 그가 긴 세월동안 그래도 비교적 훌륭했다는 증거는 아니었을까.
(...)
이후로 김소리와 내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전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미 알았고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 그렇지 않겠나. 그의 '불쌍'에 우리의 존재가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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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부끄러움 뒤에 온다고 김소리는 말했지. (...)
왜 내가 창피해야 했지? 어른 입장. 그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사람이 그냥 자라면 어느 순간 어른일 걸까?
내가 어른이야?
누가 내게 기회를 줬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억울했던 것 같아. 기억하기도 싫고 남에게 말하지도 못하는 그 일을 못 잊으면서 오랫동안. (...)
열아홉살에 어른스럽다고 여겼던 스물한살의 행동을, 스물아홉살에 내가 한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내게 꺼지라는 말을 들은 그 애들이 보였어.
살면서 부끄러운 일을 꼽으라면 이제는 제일 먼저 그 일이 생각난다. 그래서 언니 나는 내가 지금 어른 같다. 지금 내가 어른이란 걸 나는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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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소리에게 부끄러움을 가지라고 했지만 당시에 김소리가 가진 것은 수치심이었고 경멸감이었지. 그는 김소리에게 어른을 요구했지만 그 자신도 김소리에게는 어른이었으면서, 그는 김소리의 아무것에도, 김소리의 어른 됨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비난만 하고 갔어. 그의 어른 됨은 김소리를 관찰하고 김소리를 판단하고 사후에 다가와 비난할 때에만 유용하게 작동했는데, 어른 됨이 그런 것이라면 너무 편리하고 야비하지 않나.
수치심. 모멸감. 자신을 향한 남의 경멸감. 어른의 재료가... 그런 것일 수 있지. 하지만 '나를 목격하고 있는 이 사람이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는 계기라는 것을 그런 감정과 우연한 경험의 조합으로 받곤 하는 삶에 나타나는 어른이란 어떤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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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뭘까? 그것은 생각일까? (...)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해제를 쓴 정화열 선생은 상식을 '사유의 양식'이라고 칭하며 그것을 '감각에 바탕을 둔 사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상식, 또는 공통감이란 아무래도 '생각'인 모양이고, 다시 그를 인용하자면 서수경에게 적용되었다는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본래의 상식, 즉 사유의 한 양식이라기 보다는 그 사유의 무능에 가깝지 않을까.
(...)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상식이지,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배재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와 나의 상식이 다를 수 있으며 내가 주장하는 상식으로 네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조차 하질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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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 그렇지. 적나라赤裸裸 그 광경은 마치 투명한 창을 통해 보이는 남의 집 베란다처럼… …우리는 왜 때때로 베란다를 청소하듯 그것을 점검해보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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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
나는 그 태도를 묵자墨字의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 해설 중
소설은 인간의 정신이 동물적 육체로 내려앉는 그 처절한 순간에 대한 건조한 묘사를 끝에 맥락 없이 충격적인 발화 하나를 덧붙여놓는다.
공론장에 올리기에는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어왔던 맥락들이 사소하지 않음을 말하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황정은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괄호 내부의 정보들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비틀며 독해 속도를 지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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