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연세세

황정은

인생작 <디디의 우산>에 이어 두 번째로 황정은 작가님의 소설을 읽었다. 두 책 모두 삶에 대해 하소연할 법한, 마음 아픈 이야기를 의연하게 들려주는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 처연하다. 특히 ‘이순일’의 생애를 보여주는 꼭지는 읽으면서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애달픈 이야기였다.

소설엔 "용서를 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자주 등장하며, 용서를 구할 수 없는 마음은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각기 용서를 할 수 없는 마음, 용서를 구할 수 없는 마음을 간직한 채 그럼에도 이어지는 삶을 그린 소설이다. 섣부른 용서보다는 그것을 유보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준 작품이다.


발췌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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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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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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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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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이 한국어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나는 어릴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어. (…) 노먼은 한국어로 말하지 않아. 나는 한국어를 할 수 있어. 아주 조금이지만, 노먼이 가르쳐준 게 아니야. 내가 배웠어 한국어를 어른이 된 뒤에. 캐서린에게 안나의 이야기를 듣고. 안나가 캐서린에게 해준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생각해.

양갈보, 양색시.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 한 거야. 안나를 고립시키고 무시하고 경멸한 그들과, 그들의 언어를. 하지만 나는 것이 아주 강한 동조였다고 생각해. 안나를 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과 말이야. 그는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둔 거야. 


황 작가는 <연년세세>가 <디디의 우산>에 수록된 중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이어진 소설이라고 했다. 이 소설엔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황 작가는 “이 문장을 ‘안나는 안나의 삶을 여기서’라는 문장으로 받았다”며 “그 문장을 쓰고 나서야 일종의 답신을 썼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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