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한동안 소설을 읽지 않다 보면, 다시 읽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가 된다. 왜 그럴까 원인을 골몰할 정도로 자각은 없었다. 다만 소설을 읽을 때면 보편적으로 알려진 문학의 쓸모를 떠올리곤 했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로버트 맥키는 오늘날의 작가는 우선 인간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표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게 <빛의 과거>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이런 글은 삶에서 어렴풋이 느꼈지만,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언어로 경험하게 해준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글을 빌려서라도 표현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 혹은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것들을 꾸준히 구체화하려면, 치밀하게 세계를 관찰한 글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발췌
그녀를 절친하다거나 좋아하는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래 알아왔던 만큼 서로의 세목에 익숙해서 초보적인 오해 같은 게 없었고, 긴 세월 지켜본 바에 따라 어차피 바뀌지 않는 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너그럽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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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다른 것이 그대로 결격사유가 되는 단체 생활에서 내가 누군지 따위를 고민할 기회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 같은 생활 공간에서 그 다름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다름’은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다름은 개인성의 독립이지만 섞임이 그 종합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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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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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는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자주 위축되고 두려움과 자괴감에 빠지지만 그런 태도를 되도록 감춰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약점이 있다는 걸 공유하면 편해지긴 하지만 무시당하는 걸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점을 숨기고 방어하고 또 상처받았을 때 태연하게 보이는 법을 연구하면서 타인을 알아간다.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를 조종하고 휘두를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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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도 나는 그녀가 상냥한 성품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것이 타인을 몇 개의 묶음으로 분류해놓고 천편일률적 교양으로 응대하는 무례한 태도라는 건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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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게 새로 생겼을 때는 그 변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이미 갖고 있는 것의 흠을 찾아내는 데에 적극적이 되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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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혼은 길거리 헌팅과 비슷하게 절차를 무시한 타인의 행동력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때의 나로서는 상대의 결정을 뒤집을 만한 자신감과 대안이 없다는 게 내 결정인 셈이었다. 그 결과 평생 곤궁한 것들에 둘러싸여 그 안에서 비교적 좋은 것을 찾아내야 했고 그 결정을 합리화하는 데에서만 평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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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메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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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은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거나 우월감에 취한 게 아니라 단지 남에게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안에는 우연히 들어온 바람으로 가득 채워졌다가 그것이 빠져나가 텅 비워지곤 하는 허공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다. 결국은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에게 번번이 끌려다닌 꼴이 되고 말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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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이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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